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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까지 꽤 큰 용기가 필요했다. 김애란의 신작들은 나오는 족족 바로 사서 읽어보곤 했는데, 왠지 자신이 없었다. 무지 가슴이 아프고 씁쓸할 것 같았다. 그래도 궁금함이 너무도 커서 지난여름 '미리보기'를 읽어보고 괜찮으면 책을 사려고 했는데..... '미리보기'에 올려놓은 단편이 이 소설집에서 가장 가슴 저민 이야기였다. 아무래도 못 읽겠다고, 외면하다 <82년생 김지영>을 읽곤 어쩌면 읽어볼 만할지도 모르겠다고, 내가 너무 지레 겁먹은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은 어딘가에 멈춰서서 갈 곳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 같다. 누군가가 죽거나, 오랜 연인과 헤어지거나, 세상으로부터 사라지려 하거나, 익숙한 이에게서 낯선 거리감을 느끼는. 무언가를 잃고 갈 곳을 몰라 헤매이기는커녕 그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 흔히 단편집이 단편들 중 하나의 제목을 표제작으로 삼는 것과 달리 이 소설집은 <바깥은 여름>이라는 제목을 따로 붙였다. 아마 <풍경의 쓸모>에서 따온 제목인 듯하다.

 

휴대전화 속 부고를 떠올리며 문득 유리 볼 속 겨울을 생각했다. 볼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182p)

 

<침묵의 미래>를 제외한 6편의 소설이 세월호 이후에 씌였다. 자연스레 '세월호'의 그림자가 포개진다. 특히 첫 소설 <입동>이 그러하다. 처음으로 내 집 마련을 하고 누구보다 정성껏 집을 가꿨던 부부. 하지만 아이가 후진하는 어린이집 차에 치여 그 자리에서 숨진다. 손해배상을 받았지만 주인공이 보험회사 직원이란 이유로 악의적인 소문이 돈다. 직장을 그만두고 무기력해진 아내가 이웃들의 시선을 견디지 못해 집에 틀어박히자 주인공은 이사를 가려고 한다. 하지만 집값은 살 때보다 많이 떨어져 있었고, 아이의 보험금 통장에는 절대 손댈 수가 없다. 어린이집에서 잘못 보낸 복분자액이 터지면서 얼룩덜룩해진 벽면을 손보겠다면서 셀프 도배를 하다가 아내는 오열한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풀을 걸레질하다 아이가 채 쓰다만 이름을 발견한 것이다.

 

지난봄, 우리는 영우를 잃었다. 영우는 후진하는 어린이집 차에 치여 그자리서 숨졌다. 오십이 개월. 봄이랄까 여름이란 걸, 가을 또는 겨울이란 걸 다섯 번도 채 보지 못하고였다. 가끔은 열불이 날 만큼 말을 안 듣고 말썽을 피웠지만 딱 그 또래만큼 그랬던, 그런 건 어디서 배웠는지 제 부모를 안을 때 고사리 같은 손으로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던, 이제 다시는 안아볼 수도, 만져볼 수도 없는 아이였다. 무슨 수를 쓴들 두 번 다시 야단칠 수도, 먹일 수도, 재울 수도, 달랠 수도, 입맞출 수도 없는 아이였다. 화장터에서 영우를 보내며 아내는 '잘 가'라 않고 '잘 자'라 했다. 다시 만날 수 있는 양 손으로 사진을 매만지며 그랬다.

(21p)

 

ㅡ여기 이사 오고 참 좋았는데. 당신도 그랬어?

ㅡ어.

ㅡ우리가 살아본 데 중에 제일 좋았잖아. 그렇지?

그랬다. 잠이 안 올 정도로 좋았다. 어딘가 가까스로 도착한 느낌. 중심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원 바깥으로 튕겨진 것도 아니라는 거대한 안도가 밀려왔었다. 우리 분수에 이 정도면 멀리 온 거라고. 욕심 부리지 말고 감사하며 살자고 다짐한 게 엊그제 같은데. 영우가 떠난 뒤 갑자기 어마어마하게 조용해진 이 집에서 아내와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은 도배지를 들고 있자니 결국 그렇게 도착한 곳이 '여기였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절벽처럼 가파른 이 벽 아래였나 하는. 우리가 이십 년간 셋방을 부유하다 힘들게 뿌리 내린 곳이. 비로소 정착했다고 안심한 곳이 허공이었구나 싶었다. (32~33p)

 

ㅡ내 생일에 당신이 케이크 사왔잖아. 여기 식탁에서 같이 초에 불붙이고. 그때 영우는 태어나서 촛불 처음 보는 거였는데. 불을 무슨 엄청 신기한 사물 보듯 응시했잖아? 그날 내가 두 돌도 안 된 영우한테 장난으로 "영우야, 오늘 엄마 생일인데 뭐해줄 거야?" 하고 물었어. 그랬더니 영우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 그 말도 못하던 애가 잠시 고민하더니 갑자기 막 손뼉을 치더라고. 영우가 나한테 박수 쳐줬어. 태어났다고.....

아내는 연주를 끝낸 뒤 수천 명의 기립 박수를 받은 피아니스트마냥 울었다. 사람들이 던진 꽃에 싸인 채. 꽃에 파묻힌 채.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는 사람마냥 내가 붙들고 선 벽지 아래서 흐느꼈다. 미색 바탕에 이름을 알 수 없는 흰꽃이 촘촘하게 박힌 종이를 이고서였다. 그러자 그 꽃이 마치 아내 머리 위에 함부로 던져진 조화花처럼 보였다. 누군가 살아 있는 사람에게 악의로 던져놓은 국화 같았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탄식과 안타까움을 표한 이웃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기 시작했는지. 그들은 마치 거대한 불행에 감염되기라도 할 듯 우리를 피하고 수군거렸다. 그래서 흰 꽃이 무더기로 그려진 벽지 아래 쪼그려앉은 아내를 보고 있자니, 아내가 동네 사람들로부터 '꽃매'를 맞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많은 이들이 '내가 이만큼 울어줬으니 너는 이제 그만 울라'며 줄기 긴 꽃으로 아내를 채찍질하는 것처럼 보였다.

ㅡ다른 사람들은 몰라.

나는 멍하니 아내 말을 따라 했다.

ㅡ다른 사람들은 몰라. (37p)

 

<노찬성과 에반> 찬성은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와 산다. 할머니가 일하는 휴게소에 갔다가 화단에 묶여 있는 강아지를 발견하고 데려와 키운다. '에반'이라 이름 붙여준 강아지는 이미 노견이었지만 찬성은 에반에게 의지한다. 데려오고 2년이 흐르자 에반의 상태가 좀 이상한 것 같아 동물병원을 찾는다. 에반은 암이었다. 의사는 수술을 해도, 안 해도 장담할 수 없다고 한다. 찬성은 에반의 안락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전단지 알바를 해서 돈을 모으지만 할머니가 얻어다 준 휴대전화에 필요한 것을 하나씩 사다 보니 어느 새 절반의 돈이 날아가버렸다. 에반에게 줄 핫바를 사서 귀가한 날, 에반은 '아마도' 스스로 차에 뛰어들어 숨진다.

 

<건너편> 도화는 교통정보센터에서 일하는 경찰공무원, 같이 사는 이수는 공무원 준비를 하다가 포기한 직장인이다. 둘은 노량진에서 만나 사랑을 키웠다. 도화는 아들이 결혼하니 나가줬으면 좋겠다는 집주인과 이야기하다가 이수가 보증금 일부를 돌려받고 반전세로 전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2월 25일 노량진 수산시장에 가서 비싼 회를 먹다가 도화는 이수가 보증금 뺀 돈으로 직장에 가는 척하면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헤어짐을 통보한 도화는 주인아주머니를 만났을 때 이수에게 느꼈던 감정이 배신감이 아니라 안도감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이수가 공부를 그만둔 계기는 '도화'였다. 이수는 도화가 '어디 가자' 할 때 죄책감 없이 나서고, 친구들이 '놀자'할 때 돈 걱정 없이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건 사소한 갈등에 속했다. 당시 이수를 가장 히들게 한 건 도화 혼자 어른이 돼가는 과정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일이었다. 도화의 말투와 표정, 화제가 변하는 걸, 도화의 세계가 점점 커져가는 걸, 그 확장의 힘이 자신을 밀어내는 걸 감내하는 거였다. 게다가 도화는 국가가 인증하고 보증하는 시민이었다. 이 사회의 구성원이되 아직 시민은 아닌 것 같은 사람이었다. 입사 초 수다스러울 정도로 조직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하던 도화가 어느 순간 자기 앞에서 더이상 직장 얘길 꺼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 이수는 모든 걸 정리하고 노량진을 떠났다. (98~99p)

 

<침묵의 미래> '나'는 세상에서 사라지고 있는 소수언어 중 하나이다. 천여 명의 소수언어 화자가 천여 개의 언어를 지키며 사는 '소수언어박물관'에서 '나'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언어로 얘기하다 죽음을 맞이한 후두암에 걸린 노인을 떠나왔다. '나'는 사라지고 있다.

 

<풍경의 쓸모> '나'는 대학교 시간강사이다. 서울에서 다섯 시간 걸리는 지방대학에 나가 강의를 한다. 학교 앞 버스 정류장에서 문화콘텐츠 학과 곽교수를 만난 '나'는 차를 얻어 타고 가다가 곽교수가 낸 사고를 자신이 낸 것으로 처리하게 된다. 얼마 후 문화콘텐츠 학과에 교수 임용이 공지되고 '나'는 은사를 통해 '곽교수'가 반대해서 임용에서 떨어졌음을 알게 된다. 태국의 뜨거운 태양아래서. '나'의 이야기와 추문에 휩싸여 교직과 가족을 떠난 아버지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아버지를 만난 날, 그러니까 아버지가 내게 돈을 빌리러 집 앞까지 찾아온 날, 아버지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아버지는 팔을 길게 뻗어 발신자 이름을 확인했다. 그때 나는 아버지가 사물을 '그런 식'으로 보는 것에 조금 충격을 받았는데, 오래전 우리를 떠난, 그것도 '여자' 때문에 떠난 젊은 아버지가, 노안이란 걸 깨달아서였다. 아버지는 미간을 찌푸린 채 발신 번호를 판독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 바람에 내가 휴대전화 화면에 뜬 사진을 둟어져라 쳐다보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사진 속 두 사람은 등산복 차림이었다. 아버지와 그 여자는 볼을 맞댄 채 카메라를 보고 있었다. 두 사람 뒤로 탁 트인 하늘과 사방이 울긋불긋하게 물든 겹겹의 산봉우리가 보였다.

'둘이 정상에 올랐나보다.....'

조소인지 질투인지 모를 감정이 일어났다.

'등산이라니, 참 전형적으로 사신다.'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가을 풍경 속에 안긴 두 사람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쩐지 두 사람이, 좋은 일은 금방 지나가고, 그런 순간은 자주 오지 않으며, 온다 해도 지나치기 십상임을 아는 사람들 같아서였다. (181~182p)

 

<가리는 손> 남편과 헤어지고 홀로 열다섯 아이를 키우는 '나' 재이는 다문화 가정의 아이라는 이유로 편견에 시달리며 컸다. 그런데 중학생 노인 폭행 사건 동영상에 목격자로 연루된다. 재이는 내가 아는 그 사랑스러운 아이일까?

 

나는 늘 당신의 그런 영민함이랄까 재치에 반했지만 한편으론 당신이 무언가 가뿐하게 요약하고 판정할 때마다 묘한 반발심을 느꼈다. 어느 땐 그게 타인을 가장 쉬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한 개인의 역사와 무게, 맥락과 분투를 생략하는 너무 예쁜 합리성처럼 보여서. (200p)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남편은 물에 빠진 학생을 구하다가 숨졌다. 아이도 구하지 못했다. '나'는 남편이 자주 사용하던 '시리'에게 '고통'과 '죽음' 등에 대해 물으면서 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버린 남편에 대해 여전히 화가 나 있다. 그러던 어느날 죽은 아이의 누나에게 편지를 받고, 남편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편지지 위 삐뚤빼뚤한 글씨를 좇다 나도 모르게 눈가가 흐려졌다. 눈앞에 얼룩진 문장 위로 지용이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소리도 못 지르고 연신 계곡물을 들이켜며 세상을 향해 길게 손 내밀었을 그 아이의 눈이 아른댔다. 당신을 보낸 후 줄곧 보지 않으려 한 눈이었다. 나는 당신이 누군가의 삶을 구하려 자기 삶을 버린 데 아직 화가 나 있었다. 잠시라도, 정말이지 아주 잠깐만이라도 우리 생각은 안했을까. 내 생각은 안 났을까. 떠난 사람 마음을 자르고 저울질했다. 그런데 거기 내 앞에 놓인 말들과 마주하자니 그날 그곳에서 제자를 발견했을 당신 모습이 떠올랐다. 놀란 눈으로 하나의 삶이 다른 삶을 바라보는 얼굴이 그려졌다. 그 순간 남편이 무얼 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265~266p)

 

아프지만, 그래도 좋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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