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성폭력 문제를 모두가 함께 해결해나가길 바라며

 

"성폭행을 당한 일에 대해 용기 내어 말했을 때 엄마는 제일 먼저 내게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품위가 단정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데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졸업 작품 프로젝트로 성폭력의 정신적 외상이 현실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또 일상생활에서 이는 어떻게 다루어질지 토론하던 중 나온 이야기다. 그 밖에도 "어머, 나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라든가 "그 얘길 듣고 보니 내가 경험했던 일이 생각난다."라든가 "예전에는 말 못했는데 이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라는 반응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 경험담을 책으로 만들었다. 모두가 읽고 공유하도록. 그럼으로써 문제의 근원이 여성의 '존엄성' 부족에 있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피해자가 무시당하지 않고 분명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피해의 생존자들, 나는 그들의 폭로가 일종의 치유 과정이 되길 바랐다. 그리고 방관자들 또한 토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이 문제에 관한 조치를 취하자는 메시지를 담았다. '이런 일들이 실제 삶에서 매우 흔히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라는 전제하에 이야기를 시작했다. 책을 읽고 분노와 무력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토론에는 힘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인식하고 변화를 꾀하기를 열망한다. 사회는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폭력을 묵인해서는 안 되고 희생자는 자신의 상황을 알려야 한다. 침묵 속에서 홀로 고통당하기보다 함께 이야기할 때 우리는 더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다. -마리아 스토이안

 

성폭력을 경험한 전세계 남녀의 20가지 이야기

 

이 책은 전세계 남녀가 실제 경험한 폭행과 학대의 현장을 그린책이다. '그래픽노블'이라는 만화와 소설의 중간 형식을 취하고 있다. 도서관에 페미니즘에 관한 다양한 책들을 한켠에 모아두었는데 뭔가 불편해 보이는 여성의 표정과 "그냥 좋게 받아들이세요"라는 저 말에서 이미 어떤 책인지 촉이 왔다. 성희롱에 항의하는 여성들이 많이 듣는 말 중에 하나가 아닐까. 책에는 누구나 경험해봤을 대중교통에서의 성추행, 데이트 폭력, 어린아이들이 지인들에게서 당하는 성추행과 성폭력 등 20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중요한 건 '여성만이 피해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피해자가 어린아이거나 여성이지만, 가볍게는 같은 남성으로부터 신체접촉을 강요당하거나 여자친구에게서 성폭력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전여친에게 성폭력을 당하는 남성의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전여자친구는 자살협박으로 남자친구를 복종하게 만들었는데, 헤어진 후에도 잠자는 남성의 침대에 알몸으로 들어오거나 계속 협박에 가까운 말들을 남기는 등 도를 넘은 행동을 했다.  하지만 남성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녀를 고발했다면 오히려 내가 비난받았을 게 분명하다."



 

너무도 쉽게 일어나는 일들

 

내가 지하철을 탄 건 오후 2시쯤이었다.

그때 치마 밑으로 손 하나가 미끄러져 들어오는 느낌이 있다.

서로 밀리고 밀치는 만원 지하철 안에서 나는 그 손이 우연한 접촉이려니 하고 넘겼다.

그런데 지하철이 출발하자마자 네 개도 넘는 손들이 다시 치마 속으로 들어왔다. (9~10p)

 

친구 중에 웬만하면 지하철을 안 타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아이는 지하철만 타면 성추행을 당해서 정말 아주 먼 거리가 아니면 버스를 탄다고 했다. 여성이라면 한 번쯤 경험해봤을 일이지만, 그 상황에서 도와달라고 소리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어떻게든 혼자 버텨보려고, 아마 우연일 거라고, 아니면 빨리 다음 역에서 내려서 이 상황을 피하자고 생각하는 게 다반사이다. <어쩌면 어른>에서 손경이 강사가 태권도장에 다니는 여자아이의 이야기를 했던 게 생각났다. 도복을 도장에서 갈아입는 초등학교 여자아이는 학원 버스 안에서 치마 속으로 중학생 오빠의 손이 들어오는 걸 알고 필사적으로 다리를 꼬고 힘을 줬지만 손은 더 깊숙이 들어왔을 뿐이라고 했다. 왜 주변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냐고 하자, "엄마가 자기 몸은 자기가 지키는 거랬어요"라고 했단다. 아니다, 주변 사람들이 도와줘야 하는 거다. 초등학교 아이가 어떻게 자기 몸을 지킬 수가 있겠나.

 

여기 나온 이야기 중 마음 아팠던 건 아홉 살짜리 여자아이의 경우이다. 가족끼리 자주 만나게 되어 알게 된 친구가 있었다. 남자애는 "키스하자" "내 거 손으로 만져줘" "입으로 해줘"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협박한다. "안 그러면 너희 아빠한테 혼날걸? 안 그러면 너희 아빠가 불같이 화낼걸?" 말했다면 아빤 분명히 이 상황을 해결해줬을 테지만, 난 무서워서 시키는 대로 한다. 너무 어려서 야단맞는 게 무서웠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이 이런 식으로 성적 폭력을 당하고 자신을 자책하고 그것이 마음의 큰 얼룩으로 남아 모든 남자를 불신하게 되는 이 과정이 너무 가슴 아프다, 화가 난다.

 

하지만 성인 여성이라고 다르지 않다. 인터넷 사이트에서 알게 된 친구가 죽이 잘 맞아 서로의 집까지 왕래하게 된 한 여성, 그러다가 강제로 성폭력을 당하게 되는데 이 남자의 말이 어처구니가 없다. "울지 말고 즐겨라." 더 가관인 것은 결국 둘은 사귀는 사이가 되었고 여성은 일방적인 요구에 의한 섹스를 해야 했다. 그리고 모든 관계를 차단당했다. 나중에 헤어졌지만 그 일이 있은 후 그 여성은 5년 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 학교 다닐 때도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했다. 일부러 신체접촉을 하는 선생님, 막 달려가다가 가슴을 치고 도망가는 남학생들, 학교 앞을 배회하는 바바리맨. 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까? 왜 피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을까? 초등학교 때가 생각난다. 친구랑 손 잡고 걸어가다가 변태 아저씨를 만났는데 우리는 그 사람의 중요한 부위를 만져야 했다. 역겹고 더러웠지만 거부할 수가 없었다. 친구랑 수돗가로 가서 손을 박박 씻었지만 우리는 어른에게 이 이야기를 하거나 도움을 청하지 않았었다. 그냥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숨겨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제는 정말 달라져야 할 것 같다. 성폭력이 일어나면 엄마에게 제일 먼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좋으니 여성긴급전화 1336로 전화해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게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남자들이 더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이 책을. 단순히 성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자체가 어떤 여성에겐 큰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걸, 많이 알았으면 좋겠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