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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빌 백작의 범죄

 

아멜리 노통브 좋아하시나요? 전 엄청 열광하는 독자는 아니지만, 가끔 짧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가 필요할 때 노통브를 찾습니다. 이번에도 그런 책을 찾다가 제가 읽지 않은 제목이 눈에 띄길래 얼른 집어들었어요. 2017년 8월에 출간된 책이니 최신작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희극인지 비극인지 동화인지 알쏭달쏭한 이 책은 역시나 조금 짓궂은 면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주인공인 느빌 백작의 심리를 따라가다가 마지막에 탁 하고 터지는 반전이 매력적인 소설입니다.

백작이 주인공이라 배경이 옛날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2014년이 배경이네요. 집안이 파산을 맞아 마지막 가든 파티를 준비하던 느빌 백작은 딸이 가출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딸을 데리고 있다는 점쟁이를 찾아갑니다. 숲에서 덜덜 떨고 있던 막내딸 세리외즈를 집으로 데려온 점쟁이는 백작에게 불길한 예언을 합니다.

"플뤼비에성에서 열릴 마지막 가든파티에서 당신은 초대 손님 중 하나를 살해하게 될 거예요."

누군가는 웃고 넘길 일이지만, 느빌 백작은 심각했습니다. 남의 일이었다면 터무없는 이야기를 믿어서 뭣하겠느냐고 비웃었겠지만, 자신의 일이니 달랐지요. 그는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면 누구가 죽어야 할지 생각하며 불면의 밤을 보냅니다. 그때 막내딸이 백작을 찾아옵니다.

열두 살 이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며 자신을 죽여 달라는 세리외즈와 어떻게 자기 손으로 딸을 죽일 수 있겠냐는 아버지 느빌의 팽팽한 대립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세리외즈에겐 오빠 오레스트와 언니 엘렉트르가 있습니다. 트로이 전쟁에서 막내딸 이피제니를 제물로 바쳤던 아가멤논의 자식들 이름이지요. 느빌 백작은 자식을 죽이지 않기 위해 막내의 이름은 이피제니로 짓지 않았다고 하지만, 세리외즈는 발칙하게도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와 둘째의 이름을 오레스트와 엘렉트르로 지을 경우에는 충동이 너무 세서 셋째의 이름이 뭐가 되든 운명이 작동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믿어야 해요."(87p)

세리외즈는 백작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는 살해 방법을 제시하지요. 결국 우여곡절 끝에 백작은 딸을 살해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가든파티 당일, 초대 여가수가 노래를 마칠 때쯤 백작은 세리외즈를 데려가 죽이려 합니다. 하지만 세리외즈는 마음이 바뀌었다고 하지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는데 음악에 감동을 받았다고, 이제는 살고 싶다고 합니다...

자, 딸은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좀 허무할 수도 있는 반전이 결말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운명의 장난이랄까, 아이러니랄까, 손님을 살해하고 감옥에 가는 모습을 상상하던 백작에게 느닷없는 행운이 찾아오지요. 삶은 그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지금 여기가 최악이라고 생각할 때, 더는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을 때 숨통이 확 트이는 순간이 찾아오는 것 말입니다.

재미있는 건 '백작의 모습'이 '일반적인 아버지의 모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언을 믿을 수밖에 없다면 파티를 취소시키면 되지 않을까요? 그것이 아무리 마지막 가든파티라고 할지언정 딸의 목숨보다 소중할까요? 하지만 사교파티에 흥미와 재능을 보이는 백작에겐 그 마지막 파티를 성공시키는 것이 최우선이 됩니다. 귀족사회의 의무감에 도취된 백작의 모습에 아무런 공감도 할 수가 없네요.

세리외즈의 역할이 참 매력적입니다. 죽여 달라고도 죽이지 말아달라고도 그녀는 주체적으로 행동합니다. 그녀는 숲속의 잠자는 공주나 백설공주처럼 남자의 구원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전 여성이 중심에 서서 자신의 욕구와 의지를 충실하게 해결해나가는 모습이 좀 통쾌했습니다. 여러 모로 뜯어볼수록 재미있는 소설이지만 단순히 재미있게 읽을거리로도 괜찮아요.

 

<인상적인 구절>

느빌은 초대 손님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예술에 있어서 대가로 통했다. 그 분야에서 그가 모신 최고의 스승은 80년대 초에 그가 라벤스테인에서 접대한 적이 있는 보두앵왕(王)이었다. 그 기념할 만한 저녁 파티 내내, 그는 왕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주의 깊게 관찰했다. 왕은 누구에게나 오래전부터 꼭 한 번 만나 보고 싶었던 것처럼 말을 걸었다. 그는 온몸이 하나의 귀가 된 것처럼 상대방의 말을 경청했다. 느빌은 그처럼 숭고한 공손함에 큰 감명을 받았고, 결코 다른 지도자는 섬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자신이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통해 얼핏이나마 사교술의 성배(聖杯)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3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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