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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왜 미투 사건들과 관련되어 이 책이 회자되는지 알겠다. '82년생 김지영'으로 대표되는 대한민국 여성들의 삶속에 남녀차별과 불합리가 얼마나 깊이 스며들어 있는지, 때로는 여자인 우리조차 깨닫지 못할 정도로 얼마나 교묘하게 우리를 갉아먹고 있는지,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깨닫는다.
한동안 우울한 책은 읽기 싫어서 나중으로 미뤄둔 책인데, 정신과의사가 김지영에 대해 쓴 보고서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오히려 불편함이 덜했다. 아마 작가분이 시사교양프로그램의 작가생활을 하셔서 이런 문체가 뭍어나오는 듯하다.

 

내 삶에 겹쳐지는 '김지영의 삶'
소설은 2015년 서른넷 세 살 많은 남자와 결혼해 슬하에 딸을 둔 김지영 씨가 이상 증세를 보이는 것으로 시작된다. 김지영 씨는 어느 날 주변사람에게 빙의해 속마음을 내뱉기 시작한다. 시댁에서 같은 증세를 보인 후, 정신과상담을 받게 된 김지영 씨. 이 소설은 그 보고서 형식으로 되어 있다.

공무원 아빠, 주부인 엄마 밑에서 태어난 김지영의 삶은 여느 여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남자인 막내 손주만 예뻐하는 할머니, 학교에서 겪는 일상적인 차별, 대학을 나와 겨우 취업해 직장생활을 하다가 출산과 함께 퇴직. 단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맞게 살고 있을 뿐인데 '맘충'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삶. 김지영 씨의 성장 과정과 사회생활 이야기를 읽으면서 '맞아. 맞아. 이런 경우 진짜 많지.' '그래, 학교 다닐 때 그랬었어.' 하고 맞장구를 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유독 공감이 되고 눈물이 나기 시작했던 건 결혼 후 아이를 낳고 나서였다. 봐줄 사람은 없고, 일은 하고 싶은데 시간이 안 맞고, 새로운 걸 배워보려고 해도 원하는 강좌는 모두 저녁 강좌... 간만에 여유를 즐기며 애기 친구엄마들과 차 한잔 하며 깔깔 대고 있노라면 '맘충'인 듯 우리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시선. 그래서 우린 요즘 그런 얘길 한다. 그래도 아직까진 결혼하면 여자가 손해라고. 분명 같이 결혼하고 같이 집사고 같이 애낳았는데, 여자만 맨날 발 동동거리면서 뛰어다닌다고. 김지영 씨의 언니 김은영 씨가 원하는 대학 대신 교대를 가라고 권하는 엄머에게 하는 말이 참 정곡을 찌른다.
"애 키우면서 다니기에 좋은 직장 맞네. 그럼 누구한테나 좋은 직장이지 왜 여자한테 좋아? 애는 여자 혼자 낳아? 엄마, 아들한테도 그렇게 말할 거야? 막내도 교대 보낼 거야?"
여자들의 이런 삶이 쉽게 나아지지 않으리란 걸 마지막 장이 시사한다. 보고서를 마친 담당의사는 자신이 아내를 통해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특히 아이가 있는 여자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면서 자부심을 느낀다. 하지만 막상 임신으로 그만두는 여직원에 대해서는 나중에 번거로워지느니 오히려 잘됐다면서 후임은 미혼으로 알아보겠다고 한다.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도 육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직원은 곤란하다면서.

 

우리 딸들의 삶은 더 나아질까

앞으로 얼마나 많은 '김지영'이 대한민국을 살아가게 될까. 우리는 과연 우리 엄마 세대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예전보다 집안일이 수월해지고, 남자 형제를 위해 돈을 벌러 생활전선으로 뛰어드는 일이 줄어들었으니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믿어도 되는 것일까. 여성도 직업을 갖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인식과 그래도 애는 여자가 봐야 한다, 집안일은 여자가 해야 한다는 인식이 공존하는 이 사회에서 우리는 둘 다 아등바등 잘하려고 애쓰느라 더 힘들어진 건 아닐까.




소설 속 소름끼치는 장면 중 하나는 김지영 씨가 퇴사한 회사에서 벌어진 화장실 몰카 사건이다. 보안 요원이 화장실에 설치한 불법카메라의 사진을 성인들이 보는 사이트에 꾸준히 올렸는데, 이 사이트의 회원인 이 회사 과장이 영상 속의 사람들이 회사 동료임을 안다. 하지만 그는 경찰에 신고하거나 피해자들에게 알리기는커녕 다른 사원들과 사진을 공유했다. 이 사실이 여직원들 귀에 들어가면서 회사를 조사를 받는다. 그런데 남자직원들의 대응이 가관이다.

"그런데 조사받은 남자 직원들이 우리한테 너무했대. 자기들이 몰카를 설치한 것도 아니고, 사진을 찍은 것도 아니고, 그냥 아무나 볼 수 있는 사이트에 올라온 사진 좀 본 거 가지고 성범죄자를 만들려고 한다면서. 사진 유포했잖아. 범죄를 방조했잖아. 근데 그게 잘못인 줄도 몰라. 완전히 개념이 없더라니까."

하,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들이 태만인 대한민국에서 우리 딸들은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씁쓸하다.

 

소설 속 각종 차별과 편견들
"언니는 분유 맛없어?"
"맛있어."
"근데 왜 안 먹어?"
"치사해서."
"응? 치사해서 안 먹어 절대 안 먹어."
김지영 씨는 치사하다는 단어의 뜻을 정확히 몰랐지만 언니의 기분은 알 수 있었다. 할머니가 혼내는 게 단순히 김지영 씨가 더 이상 분유 먹을 나이가 아니라거나 동생 먹을 게 부족해진다거나 하는 이유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억양과 눈빛, 고개의 각도와 어깨의 높이, 내쉬고 들이쉬는 숨까지 모두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말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최대한 표현하자면, '감히' 귀한 내 손자 것에 욕심을 내? 하는 느낌이었다. 남동생과 남동생의 몫은 소중하고 귀해서 아무나 함부로 손대서는 안 되고, 김지영 씨는 그 '아무'보다 못한 존재인 듯했다. 언니도 비슷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24~25p

 

차승연 씨는 항상 특별 대우 같은 건 필요 없으니 여학생들도 똑같이 일 시키고 기회도 똑같이 달라고, 점심 메뉴 선택 같은 것 말고 회장을 시켜 달라고 말했다. 그러면 대부분 대충 웃으며 그래그래, 하고 넘겼는데 9년 동안 가장 열심히 동아리에 나오고 있는 박사 과정 남자 선배 하나가 매번 같은 대답을 했다.
"내가 몇 번을 말하니? 여자는 힘들어서 못해요. 너희는 그냥 동아리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우리한테 힘이 되는 거야."
"저 선배한테 힘 돼 주려고 나오는 거 아니거든요? 기운 없으면 보약 한 채 해 드시든가. 내가 진짜 다 때려치우고 싶지만 악착같이 나와서 여자 회장 꼭 보고 말 거야." -91p

 

"아, 됐어. 씹다 버린 껌을 누가 씹냐?"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지만 남에게 억지로 권하지는 않고, 후배들에게 밥을 잘 사 주지만 되도록 함께 먹지는 않는 선배였다. 태도가 단정하고 깔끔해서 김지영 씨도 항상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설마설마 싶어서 귀를 쫑긋 세우고 더 유심히 들었는데, 아무래도 그 선배의 목소리가 맞았다. 취했을 수도 있고, 쑥스러운 것일 수도 있고, 친구들이 괜한 짓을 할까 봐 더 과격하게 말했을 수도 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김지영 씨의 처참한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일상에서 대체로 합리적이고 멀쩡한 태도를 유지하는 남자도, 심지어 자신이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여성에 대해서도, 저렇게 막말을 하는구나. 나는, 씹다 버린 껌이구나. -93p

 

김은실 팀장은 4명의 팀장 중 유일한 여자 팀장이었다. 초등학생 딸이 하나 있는데, 친정어머니와 함께 살며 육아와 가사는 완전히 어머니께 맡기고 본인은 일만 한다고 들었다. 누군가는 멋지다고 했고 누군가는 독하다고 했고 누군가는 뜬금없게도 남편을 칭찬했다. 처가살이가 시집살이보다 고되다는 둥 요즘은 장서 갈등이 사회 문제라는 등 하며, 장모를 모시고 사는 걸 보면 만난 적은 없지만 김은실 팀장의 남편은 좋은 사람일 거라고 했다. 김지영 씨는 17년간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어머니를 생각했다. 할머니는 어머니가 미용 일을 하러 나간 동안 잠깐씩 막내를 봐주셨을 뿐 삼 남매를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등의 돌봄 노동은 전혀 하지 않으셨따. 다른 집안일도 거의 안 하셨다. 어머니가 차린 밥을 드시고, 어머니가 빨아 놓은 옷을 입고, 어머니가 청소한 방에서 주무셨다. 하지만 아무도 어머니에게 좋은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다. -111p

 

"그래도 지영아, 잃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얻게 되는 걸 생각해 봐. 부모가 된다는 게 얼마나 의미 있고 감동적인 일이야. 그리고 정말 애 맡길 데가 없어서, 최악의 경우에, 네가 회사 그만두게 되더라도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책임질게. 너보고 돈 벌어 오라고 안 해."
"그래서 오빠가 잃는 건 뭔데?"
"응?"
"잃는 것만 생각하지 말라며, 나는 지금의 젊음도, 건강도, 직장, 동료, 친구 같은 사회적 네트워크도, 계획도, 미래도 다 잃을지 몰라. 그래서 자꾸 잃는 걸 생각하게 돼. 근데 오빠는 뭘 잃게 돼?"
"나, 나도..... 나도 지금 같지는 않겠지. 아무래도 집에 일찍 와야 하니까 친구들도 잘 못 만날 거고. 회식이나 야근도 편하게 못할 거고. 일하고 와서 또 집안일 도우려면 피곤할 거고. 그리고 그, 너랑 우리 애랑, 가장으로서..... 그래, 부양! 부양하려면 책임감도 엄청 클 거고." -136~137p

 

회사에서는 임신한 직원들의 안전을 위해 출근과 퇴근 시간을 30분씩 늦출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는데, 김지영 씨가 임신 사실을 알리자마자 남자 동기가 대뜸 말했다.
"와, 좋겠다. 이제 늦게 출근해도 되겠네."
그럼 너도 계속 구역질하고, 제대로 먹지도 싸지도 못하면서, 피곤하고, 졸립고, 여기저기 아픈 상태로 지내든지. -138p

 

"그놈의 돕는다 소리 좀 그만할 수 없어? 살림도 돕겠다, 애 키우는 것도 돕겠다, 내가 일하는 것도 돕겠다, 이 집 오빠 집 아니야? 오빠 살림 아니야? 애는 오빠 애 아니야? 그리고 내가 일하면, 그 돈은 나만 써? 왜 남의 일에 선심 쓰는 것처럼 그렇게 말해?" -144p

 

"예전에는 방망이 두드려서 빨고, 불 때서 삶고, 쭈그려서 쓸고 닦고 다 했어. 이제 빨래는 세탁기가 다 하고, 청소는 청소기가 다 하지 않나? 요즘 여자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더러운 옷들이 스스로 세탁기에 걸어 들어가 물과 세제를 뒤집어쓰고, 세탁이 끝나면 다시 걸어 나와 건조대에 올라가지는 않아요. 청소기가 물걸레 들고 다니면서 닦고 빨고 널지도 않고요. 저 의사는 세탁기, 청소기를 써 보기는 한 걸까. -149p

 

"그 커피 1500원이었어. 그 사람들도 같은 커피 마셨으니까 얼만지 알았을 거야. 오빠, 나 1500원짜리 커피 한잔 마실 자격도 없어? 아니, 1500원이 아니라 1500만 원이라도 그래. 내 남편이 번 돈으로 내가 뭘 사든 그건 우리 가족 일이잖아. 내가 오빠 돈을 훔친 것도 아니잖아. 죽을 만큼 아프면서 아이를 낳았고,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전부 포기하고 아이를 키웠어. 그랬더니 벌레가 됐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돼?" -16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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